2011년 9월 15일 목요일

제이슨 바커와의 대담 (1)

이 대담은 좌파 사상의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 온라인매체 뉴레프트프로젝트(New Left Project) 2011년 5월 26일자에  “맑스, 매트릭스에 들어가다”(Marx Enters the Matrix)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대담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제이슨 바커와의 대담
네마냐 코르시치(루블라냐대학교 석사과정)


왜 맑스를 재장전해야 하는가?
원래 나는 맑스의 편지들을 각색해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이 아이디어는 이제 내 다음번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전 세계적 금융•경제위기가 발생했다. 그때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를 밝히는 데 맑스의 사상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사실에 근거해 지금의 시점에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직감했다. 흔히 “맑스가 옳았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다들 왜 그런지는 결코 설명하지 않더라.

맑스를 다루는 TV용 다큐멘터리는 흔치 않다. 이 영화를 만들 때 방해받지는 않았는가?
아르테/ZDF와 독일 제작자들은 내 대본을 아낌없이 지원해줬다. 당연히 처음에는 그들이 지게 될 책임에 꽤 신경이 쓰였다. 맑스의 사상은 여전히 급진적인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TV에서 혁명을 벌일 수는 없다. TV 내용은 매우 엄격히 규제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맑스의 사유를 현대의 맥락에 위치시켜보려는 이 영화의 목적은 좀 얌전해 보일런지 모르겠다.

맑스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맑스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좀체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내 경험을 말해보면 TV쪽 사람들이 그런 프로그램을 원하지 않는 것 같더라. 제작비가 너무 비싸니까. 내가 틀린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정치적으로 논란거리라고 해서 TV쪽 사람들이 맑스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문제는 상업성이다. 알다시피 맑스의 상업성이 알려진 적이 없지 않은가? 맑스가 유행인 적도 없었고.

<맑스 재장전>은 상영시간이 52분밖에 안 된다. 이 때문에 맑스의 사상이 희화화될 위험은 없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 애니메이션도 삽입되어 있고. 그러나 언론들이 맑스에 대해 주구장창 떠드는 상투어로 점철된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힘썼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맑스주의가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어떻게 맑스주의를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가?” 맑스 재장전 은 맑스주의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맑스의 사상이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 탐구하고 있다. 이건 큰 차이이다.

왜 애니메이션을 활용했는가?
그래야 맑스를 트로츠키와 만나게 할 수 있으니까.

이 영화는 최근의 ‘맑스 르네상스’ 현상도 언급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이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맑스를 트로츠키보다는 지젝과 만나게 할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없다. 사실 ‘맑스 르네상스’라는 현상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09년 알랭 바디우와 지젝이 “공산주의라는 이념”(Idea of Communism)에 대해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 가봤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맑스와 더불어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는 공산주의이다.

맑스 없는 맑스주의 혹은 공산주의인 셈인가?
바디우의 입장은 그렇다. 바디우는 맑스를 [실제적인 정치적 혁명이 아닌] ‘논리적 반란’의 인물로 읽고 있다. 내가 보기에 공산주의는 맑스라는 이름과 쉽게 떼어놓고 생각해볼 수 있는 이념이 아니다. 당신이 정말 맑스 없는 공산주의를 원한다면, 우선 이런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공산주의라고 부르는가?” 물론 바디우나 지젝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늘 공산주의라는 대상/목적보다 ‘이념’을 주장해왔으니까.

그렇지만 “공산주의는 여전히 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재앙을 불러온 역사적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음, 그건 좀 철학적인 문제이다. 내 생각에 바디우와 지젝은 꽤 표준적인 방식으로 플라톤주의를 적용하고 있는데, 플라톤주의는 정치를 형식주의로 몰고갈 수 있다. 스피노자주의도 이와 비슷한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스피노자주의적 맑스주의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0세기의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라 실상 사회주의였다고 말할 때,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고 말할 때 네그리는 바디우나 지젝의 입장과 가까워진다. 물론 이들의 입장은 철학적으로 다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여러 경제•생태위기를 공산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가?
지구의 천연자원 파괴 같은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재앙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늘 위기의 ‘해결책’을 발명해냈다. 이른바 ‘녹색 테크놀로지’도 그런 것이다. 공산주의는 이 세상을 재앙에서 구해내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어떻게 다룰지, 위기에서 어떻게 이익을 끌어낼지를 이미 오래 전부터 배워왔다. 공산주의의 타당성은 이처럼 즉각적으로 자명해 보이는 게 아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아직도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면서 끊임없이 여러 질문들을 던지게끔 만들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

“맑스는 예언자였다”라는 생각이 오늘날의 통념이 된 듯하다. 맑스는 정말 예언자인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맑스의 경제이론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사실 맑스에게 영감을 받은 대다수 철학자들도, 이들 대부분이 이 영화에 나오는데, 마찬가지이다. 맑스가 상식적인 철학자가 되어버렸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맑스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말이다. 맑스는 BBC라디오가 선정한 최고의 철학자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상식적’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해주며 그의 사유는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그렇다고 맑스가 노스트라다무스는 아니다. 맑스에게 앞날을 점쳐주는 수정구슬 같은 건 없다.

당신의 새 영화 <맑스 돌아오다>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뭔가?
역사적 인물로서 맑스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재치 있는 실제 인물로 말이다. (끝)


※ 이 대담과 서구에서의 ‘맑스 르네상스’에 대한 촌평으로는 “<맑스 재장전>과 맑스 르네상스”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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